강남역 근처에서 상담받고 그냥 커피만 마시고 돌아온 날

강남역 근처에서 상담받고 그냥 커피만 마시고 돌아온 날

어느 날 갑자기 엄마의 등쌀에 떠밀려 강남역 어딘가에 있는 결혼정보회사에 다녀왔다. 정확히 말하면 상담 예약이라는 걸 잡아놓고, 그 앞 카페에 앉아 한 시간 정도 고민하다가 들어갔다. 입구부터 로비가 너무 깨끗하고 향수 냄새가 진해서 들어가자마자 숨이 좀 막히는 기분이었다. 데스크에 앉은 상담사분은 웃는 얼굴이었지만, 내 나이랑 직업, 그리고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는지를 묻는 질문들이 이어지자 왠지 모르게 초조해졌다.

잊고 지냈던 내 정년기라는 단어

상담사분이 서류를 체크하면서 ‘요즘은 30대 후반도 다들 오시죠’라며 웃는데, 그게 위로인지 그냥 하는 소리인지 구분이 안 갔다. 사실 나는 결혼 정년기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뉴스에서 정치인들이 출산율 때문에 이 단어를 쓸 때마다 마치 내가 공장에서 찍어내야 하는 부품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런데 막상 좁은 상담실에 앉아 내 조건을 점수 매기듯 훑어보는 시선을 마주하니, 정말 나도 그런 부품 중 하나가 되어가는 건가 싶어 씁쓸했다. 비용은 대략 가입비만 몇백만 원 단위였는데, 이게 단순히 사람을 만나는 가격이라기보다는 내 미래의 가능성을 고정시키는 기분이라 선뜻 결제하기가 망설여졌다.

스드메만큼이나 복잡한 결정사 세계

결혼 정보를 찾아보면서 느낀 건데, 웨딩 카페에서 보던 ‘스드메’만큼이나 이쪽 세계도 용어가 복잡했다. 등급제니 뭐니 하는 말들은 듣기만 해도 피로했다. 내 친구는 예전에 다른 업체에 가입했다가 한 달에 한두 번 들어오는 프로필만 보고 지쳤다고 했다. 그 친구 말로는 ‘내가 사람을 보러 나가는 건지, 이력서 검토하러 나가는 건지 모르겠다’더라. 강남 한복판에서 상담받고 돌아오는 길에 그 친구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결국 자연스러운 만남을 포기하지 못하고 다 탈퇴했다는데, 나도 그런 용기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지금 당장 누구를 만나서 데이트하고 결혼까지 생각하는 게 내 일상에 들어올 자리가 있기는 한 건지.

100억대 자산가 글을 보고 든 생각

얼마 전에 커뮤니티에서 키 170 안 되는 남자가 100억대 자산이 있으면 10살 연하와 결혼이 가능하냐는 글을 봤다. 댓글들은 거의 전쟁터였다. 어떤 사람은 돈이면 다 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래도 성격이 중요하다며 훈수를 뒀다. 그 글을 읽으면서 한참 웃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나도 그 사람들처럼 누군가를 조건으로만 평가하고 있는 건 아닌지 싶어 마음이 불편해졌다. 내가 누군가를 만날 때도 똑같이 점수 매겨지고 있을 테니까. 1시간 정도 상담받고 나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생수 하나 사 마시며 강남역 9번 출구 쪽을 멍하니 바라봤다.

돌아오는 길에 남은 묘한 기분

결국 당일 가입은 안 했다. ‘생각해 보고 연락드릴게요’라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진부한 거절인 걸 상담사분도 아는 눈치였다. 사실 그 비용이면 여행을 가거나 차를 바꾸는 게 더 확실한 행복일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나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 정말 시기를 놓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함도 여전하다. 집에 와서 씻고 나오니 밤 10시가 넘었다.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보는데, 소개팅 어플 광고가 또 뜨더라. 나이가 들어간다는 게 단순히 숫자가 늘어나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자연스럽게 섞이는 법을 잊어버리는 과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잘 모르겠는 다음 선택

내일 출근해서는 또 평소처럼 일하고,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겠지. 어제 상담받았던 곳에서 문자가 왔다. 이번 주에 새로 가입한 회원들 프로필이 업데이트되었다는 내용이다. 삭제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놔두었다. 왠지 나중에 정말 외로워지면 다시 열어볼 것 같아서. 결혼 정보 회사가 인생의 해답은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가끔은 누가 정해준 리스트를 보고 고르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정말 결혼하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그냥 남들 다 하니까 나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인지 아직도 정리가 안 된다. 그냥 이렇게 며칠 더 고민해 볼 생각이다.

댓글 1
  • 프로필 업데이트 내용 보니까, 비슷한 고민 했던 사람들도 많구나. 그 시간에 나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