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7월 말쯤이었던 것 같다. 진짜 숨이 턱턱 막히는 한여름 더위였는데, 연애 초반이라 매번 가던 흔한 프랜차이즈 카페나 어두컴컴한 영화관 말고 좀 그럴듯하고 기억에 남을 만한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 인터넷에 실내데이트코스 관련해서 이것저것 검색해보니까 서울식물원이 자주 보이길래 깊게 고민 안 하고 거기로 목적지를 정했다. 마곡나루역 3번 출구 쪽으로 나가서 조금만 걸어가면 바로 연결된다고 하길래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솔직히 지하철 안은 에어컨이 빵빵해서 시원하니까 역에서 내릴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꽤 괜찮았고, 약간 설레기도 했다. 출구 밖으로 나오자마자 후끈한 습기가 온몸을 덮치긴 했지만, 거대한 식물원 건물이 눈앞에 바로 보여서 금방 시원한 실내로 들어갈 수 있을 거라 굳게 믿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더위를 피해 마곡나루역 근처로 목적지를 정했던 이유
사실 매주 주말마다 만날 때마다 밥 먹고 카페 가고 영화 보는 코스가 조금 지루해지던 참이었다. 그래서 좀 색다른 풍경을 보고 싶었고, 실내 공간이니까 당연히 시원할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서울식물원은 공간도 넓고 푸릇푸릇한 식물들이 많으니 사진 찍기에도 좋고 쾌적할 거라는 막연한 환상이 있었다. 게다가 지하철역이랑 바로 붙어 있다시피 하니까 땡볕 아래를 오래 걸을 필요도 없어서 여름 데이트 코스로 딱이라고 생각했다. 여자친구한테 “이번에는 조금 특별한 데 가보자”며 큰소리를 땅땅 치고 출발했는데, 그게 내 착각의 시작이었다는 걸 도착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온실 입구에서 마주한 뜻밖의 열기와 땀방울
매표소에 도착해서 성인 입장료 5,000원을 내고 표 두 장을 끊을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참 좋았다. 주말 오후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표소 앞 대기 줄이 그렇게 길지 않아서 한 5분 정도 기다렸다가 금방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매표소를 지나 온실 본관의 육중한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들었다. 아 맞다, 여기 식물원 온실은 열대와 지중해 지역 식물들이 자라는 곳이었지.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내 몸이 예상치 못한 온실 특유의 고온다습한 열기가 훅 들어왔다. 실내라고 해서 무조건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공간일 거라고 생각했던 게 나의 가장 큰 실수였다. 천장의 유리창을 통해 햇빛이 그대로 쏟아져 내렸고, 식물들을 위해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가습기의 미스트가 더해져 내부 공기는 마치 찜질방 막에 들어온 것처럼 텁텁했다. 여자친구의 예쁘게 세팅된 앞머리가 조금씩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기 시작하는 걸 보는 순간 내 등에서도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에어컨 바람을 찾아 식물원 안쪽을 헤매던 시간들
온실 내부는 일방통행 관람 동선처럼 엮여 있어서 중간에 바로 빠져나가기가 곤란한 구조였다. 기왕 돈 내고 들어온 거 끝까지는 보고 나가자는 생각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야자수 아래를 지나가고 연못 위 다리를 건널 때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스카이워크라고 불리는 공중 보행로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갈 때는 진짜 정수리가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뜨거운 공기가 위로 갇혀서 그런지 숨쉬기가 더 답답해졌다. 주변에 이국적이고 신기한 꽃들과 엄청나게 큰 선인장들이 늘어서 있었지만 솔직히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오직 ‘여기 에어컨 나오는 곳은 없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커플들도 손에 든 브로셔로 연신 부채질을 해대며 굳은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중에 휴대폰 시계를 확인해보니 온실 안에서 걸어 다닌 시간은 겨우 40분 남짓이었는데, 체감상으로는 거의 반나절 동안 찜통 속에 갇혀 있었던 것 같은 묘한 기분이었다.
현대백화점 같은 대형 몰로 갈 걸 그랬나 싶었던 후회
온실의 출구를 지나 마침내 기념품 판매점과 작은 카페가 있는 본관 로비로 나오자마자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피부에 닿았다.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한참 동안 땀을 식히면서 속으로 엄청난 후회를 했다. 차라리 여의도 더현대 서울이나 잠실 롯데월드몰 같은 대형 복합쇼핑몰로 갈 걸 그랬나 싶었다. 거기는 주말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기가 빨리고 주차하기도 힘들다는 단점이 있지만, 적어도 몸이 땀으로 젖어 불쾌해지는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식물이 자라려면 고온다습한 환경이 필수적이라는 그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과학 사실을, 데이트 계획을 짤 때는 왜 단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는지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여자친구는 연신 손부채질을 하면서도 나한테 미안할까 봐 “그래도 평소에 못 보던 특이한 나무들 많이 봐서 재밌었어”라고 웃으며 말해줬지만, 영혼이 한참 빠져나간 듯한 초점 잃은 눈빛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결국 근처 카페에서 한 시간 동안 말없이 음료만 마신 결말
식물원을 도망치듯 빠져나와 근처 마곡 지구 골목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하지만 날씨가 워낙 덥다 보니 주변 카페들도 이미 피서하러 온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한두 군데는 자리가 없어 그냥 발길을 돌렸고, 세 번째로 찾아간 골목 구석의 조그만 카페에서 겨우 한 자리가 나서 들어갈 수 있었다. 대기 시간까지 합쳐서 20분 넘게 기다린 끝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받아 들었다. 시원한 매장 안에서 차가운 유리잔을 손에 쥐자 그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우리는 한동안 서로 대화도 나누지 않고 빨대로 얼음 휘젓는 소리만 내며 음료를 들이켰다. 무언가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 준비했던 데이트였는데, 결과적으로는 서로 기운만 빼고 땀범벅이 되게 만든 꼴이라 미안하고 민망해서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조심스러웠다. 결국 그날 데이트는 카페에서 대충 땀을 식히다가 저녁 식사도 대충 근처 밥집에서 해치우고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여름철 실내 데이트라고 해서 다 같은 시원한 실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배운 날이었지만, 아직도 가끔 그날의 끈적했던 공기가 생각나면 미안한 마음이 은근히 남아있다.
그렇다 보니 에어컨 바람을 찾아 헤매는 모습이 딱 맞네요. 땀으로 흠뻑 젖은 채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는 게 묘하게 웃기네요.
온실 안에서 바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니, 정말 예상 밖이었네요. 저는 어디까지나 정보만 보고 가니까, 몸으로 느껴야 하는 부분까지 놓치고 있었던 것 같아요.